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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아펜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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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헨리 아펜젤러는 1885년 한국에 파견된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이다. 그는 배재학당을 설립하여 한국 근대 교육에 기여했으며, 정동제일교회를 세우고 성경 번역에도 참여했다. 또한 독립협회를 지원하는 등 한국 사회 발전에 기여했다. 1902년 목포에서 성경 번역 회의에 참석하려다 배 사고로 사망했다.

2. 가문

아펜젤러의 가계는 스위스 동북 지방의 아펜첼(Appenzell) 출신이다. 1735년, 친증조부 제이콥 아펜젤러가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아 펜실베이니아주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었다. 친조부 제이콥 3세는 농장을 소유, 운영하였으며, 아버지 기디언 아펜젤러(Gideon Appenzeller)는 1823년에 태어났다. 어머니 머리아 거하드(Maria Gehard)는 독일 출신 이민 5세대로, 메노파 신도로서 랭커스터에서 성장하여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다. 1855년 12월, 기디언 아펜젤러와 결혼하여 사우더턴(Souderton)으로 이주했다.[20]

헨리 게르하르트 아펜젤러는 1858년 펜실베이니아주 사우더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독일 개혁 교회에 다녔다. 헨리의 모국어는 독일어였으며, 펜실베이니아 독일어를 사용하며 성장했다. 훗날 그는 독일어 구사 능력을 바탕으로 미국, 유럽, 한국에서 독일인들과 쉽게 소통하였다.[4][5]

아펜젤러는 한국으로 떠나기 전 엘라 도지(Ella Dodge)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딸 앨리스 레베카 아펜젤러는 한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미국인으로,[6][2]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하며 한국 여성 교육에 헌신했다. 아들 헨리 도지 아펜젤러 역시 배재학당 교장을 역임하며 한국 교육 발전에 기여했다.

헨리 아펜젤러의 손녀, 1929년

3. 생애

1858년 펜실베이니아주 사우더턴에서 태어나 프랭클린 & 마셜 칼리지를 졸업하고 드류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885년 감리교 목사가 되었고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일본에서 이수정에게서 한국어를 배우기도 했다.[16]

1885년 4월 5일, 아내 엘라 J. 도지, 장로교 선교사 호레이스 언더우드와 함께 인천에 도착했다. 내리교회, 정동제일교회 등을 세우고 전국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배재학당(배재대학교의 전신)을 설립하여 이승만 등 후학을 양성했고,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고 대한성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를 설립했으며, 월간지 '더 코리안 리포지토리' 발간에 기여했다. 독립협회를 지원하기도 했다.

1902년 성경 번역 회의차 목포시를 방문 중, 물에 빠진 조선인 소녀를 구하려다 익사했다(44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묘소가 있다.

3. 1. 유년기와 교육

헨리 게르하르트 아펜젤러는 1858년 펜실베이니아주 사우더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독일 개혁교회인 임마누엘 레이디스 처치(Immanuel Leidy’s Church)에 출석했다. 아버지가 유아세례를 믿지 않았고 어머니 역시 재세례파였기에, 헨리 아펜젤러는 14살이 되던 해인 1872년 11월 8일 출석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21]

어머니는 헨리와 두 형제에게 주일 오후에 독일어 성경을 읽어주며 신앙에 영향을 미쳤다. 어머니가 독일어를 사용했지만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기 때문에 독일어가 헨리의 모국어였다. 그는 집에서 펜실베이니아 독일어를 사용하며 자랐다.

1876년 10월 1일, 웨스트체스터 장로교회에서 회심하였는데, 이 날을 '영적으로 거듭난 날'로 평생 기억하였다. 웨스트체스터 주립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델라웨어 카운티 공립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였다.

1878년, 아버지의 지원으로 프랭클린 앤 마셜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대학에서는 그리스어와 문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프랑스어, 히브리어, 코이네 그리스어도 공부했다.[23][24] 괴테 문학 동아리 회장을 맡기도 했다.[25]

감리교 사람들과 교제하며 영적인 만족감을 느껴 1879년 4월 21일 랭커스터 제일감리교회 기도모임과 성경공부를 다니며 감리교로 옮겼다.[22] 개종 3년 후, 스물한 살에 펜실베이니아주 랭커스터에 있는 감리교 감독 교회에 가입하여 감리교 목사로 봉사했다. 그 후 드루 신학교에 다녔고, 드루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해외 선교사 봉사에 참여했다.

3. 2. 신학 수업과 선교 결심

헨리 아펜젤러는 필라델피아 연회에서 전도사 안수를 받고 랭카스터 제일감리교회에서 잠시 전도사로 일했다.[21] 1881년 2월 19일, 선교사의 소명을 느끼기 시작했고, 1882년에 뉴저지주 메디슨에 있는 감리교 신학교인 드류 신학교에 진학했다. 2학년인 1883년에는 '신학교 간 선교사 연맹'에 참석하며 해외 선교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되었다.[26] 처음에는 일본 선교사가 되기를 원했으나, 한국 선교를 준비하던 친구 워즈워스가 병에 걸려 한국에 갈 수 없게 되자, 대신 한국으로 선교를 가기로 결심했다.[27][28] 같은 해, 제4회 전국신학생 선교대회에 드류신학교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26]

조선 선교를 결심했지만, 감리회 선교국에서는 아펜젤러의 파송을 모두 찬성하지는 않았다. 조선 선교를 위해 2000USD를 희사한 가우처 목사는 경력 있는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리회 본부에서 중국 및 조선 파송 선교사 임명권을 가진 찰스 파울러 감독이 아펜젤러를 변호하여 가우처 목사를 설득했고, 결국 아펜젤러가 조선 선교사로 파송되기로 결정되었다.[29] 1884년 12월 17일, 엘라 닷지(Ella J. Dodge)와 모교회인 랭커스터 제일감리교회에서 결혼했다.

3. 3. 조선 선교

1885년 부활절 아침, 아펜젤러는 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함께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당시 서울은 갑신정변 직후의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공개적으로 교회를 세우거나 설교할 수 없었다. 아펜젤러는 초기 2년 동안 선교사 숙소를 마련하는 데 힘썼으며, 1887년에 이르러서야 공개 예배가 가능해졌다.[7]

아펜젤러는 조선에서의 선교를 통해 이교도 조선을 기독교 조선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7] 그는 정동제일교회[8][9], 배재학당[4] 등 많은 개신교 기관을 설립했으며, 성서 번역 위원회에 참여하여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데에도 기여했다.[2] 또한 한국 최초의 기독교 신문인 ''The Korean Christian Advocate''를 창간하였다.[10][11]

3. 3. 1. 초기 입국 과정

1885년 1월 14일, 아펜젤러는 드류대학교에서 파송예배를 받고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30] 2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다음 날 아내와 함께 아라빅호(S. S. Arabic)에 올랐다. 배에는 윌리엄 스크랜턴과 그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도 함께 타고 있었다. 이들은 2월 27일 요코하마항에 도착, 3월 5일 로버트 새뮤얼 매클레이 선교사가 주최한 제1회 한국선교사회에 창립멤버로 참석했다. 여기에는 매클레이 부부, 스크랜턴 부부, 메리 스크랜턴, 아펜젤러 부부, 그리고 박영효이수정이 함께했다.[31]

3월 23일 요코하마를 출발하여 고베를 거쳐 3월 28일 나가사키에 잠시 머문 이들은 3월 31일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같은 배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같은 날, 감리회 본부는 조선선교부 감리사에 매클레이를, 부감리사에 아펜젤러를, 선교부 회계에 스크랜턴을 임명했다.[31] 4월 2일 아침 부산에 도착, 하루를 머문 후 4월 3일 부산을 떠나 인천 제물포항으로 향했다. 마침내 부활주일인 1885년 4월 5일,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는 인천 제물포에 도착했다.[32][33]

당시 주한미국공사대리였던 조지 클레이턴 포크갑신정변 직후의 불안한 정국과 임신한 여성이 생활하기에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아펜젤러 부부의 입국을 만류했다.[32][33] 결국 언더우드만 서울로 가고, 아펜젤러 부부는 포크의 조언을 따라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7월 29일에 서울에 들어와 첫 예배를 보았다. 1885년 11월 9일, 아펜젤러 부인은 서울에서 딸 앨리스를 순산했는데, 이는 한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 아기로 알려져 있다.[32]

3. 3. 2. 선교 및 교육 활동

1885년 8월 3일부터 청년들을 모아 영어와 신학문을 가르치는 교육 사업을 시작했다. 1886년에 학생 수가 20명이 넘어서자 고종배재학당[34]이라는 이름과 함께 현판을 하사하였다.[35] 배재학당은 배재대학교와 배재중고등학교의 전신으로, 암기보다는 판단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교육 방식을 개선하는 데 공헌하였다.[38]

1885년 10월 11일, 아펜젤러는 자신의 집에서 성찬 예배를 드리며 교회를 시작하였다. 점차 참석 인원이 늘어나면서 1887년 9월에는 더 넓은 공간을 구입하여 예배당을 옮겼는데, 이것이 훗날 정동제일교회가 되었다.[36][37] 1891년에는 인천 지역 성도들을 위해 인천 중구 내동에 내리교회를 설립했다.

아펜젤러는 언더우드, 게일 등과 함께 마가복음, 로마서 등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참여하였다.[38] 또한 1897년 2월 2일에는 한국 최초의 기독교 신문인 ''The Korean Christian Advocate''를 창간했다.[10][11]

3. 3. 3. 사회 참여

아펜젤러는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지원했으며, 그들이 투옥되었을 때 그들을 보살폈다.[7]

3. 4. 사망

1902년 44세가 되던 해, 인천에서 전라남도 목포로 가던 중 어청도 서북방 2-3해리 지역에서 일본 배 구마가와마루와 같은 회사 소속인 기소가와마루가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구마가와마루가 침몰하면서 아펜젤러는 조선인 여학생을 구하려다 익사했다.[39]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있는 아펜젤러 묘소


생존자 증언에 따르면, 배의 침몰 속도가 매우 빨랐고 보일러 폭발도 있었다. 아펜젤러는 한국인 여성과 그 아이를 깨워 객실에서 나오도록 돕다가 탈출이 늦어진 것으로 알려졌다.[12]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있는 아펜젤러의 묘는 가묘이다. 그의 시신은 여학생, 그리고 조사 조한규와 함께 어청도 바다 밑에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39]

4. 가족

아펜젤러는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며 가족을 이루었다.

딸 '''앨리스 레베카 아펜젤러'''(Alice Rebecca Appenzeller영어, 1885년 10월 9일 - 1950년 2월 20일)는 서울에서 태어나 한국 여성 교육에 헌신하였다. 이화여자전문학교(현 이화여자대학교)의 교장을 역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에서 사망했다. 서울마포구에 있는 아버지의 묘 옆에 묻혔다.[17]

아들 '''헨리 도지 아펜젤러'''(Henry Dodge Appenzeller영어, 1889년 - 1953년) 역시 한국에서 교육 활동에 헌신하여 배재학당의 교장을 역임했다.

5. 유산과 평가

대한제국명성황후는 논란이 많은 근대화 및 서구화 정책의 일환으로 기독교 선교사의 입국을 허용했다.[13] 기독교대한감리회는 한국의 주요 개신교 교단 중 하나로 성장했으며, 배재학당을 비롯한 여러 교육 기관과 감리교신학대학교 등의 신학대학을 설립했다. 2016년에는 정동제일교회에서 헨리 아펜젤러의 흉상을 드루 신학대학에 기증하여 그의 헌신을 기렸다.[14]

5. 1.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

기독교대한감리회는 19세기 창립 이래 한국의 주요 개신교 교단 중 하나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2001년 당시 감리교는 교회 5,262개, 교인 1,394,514명, 목사 7,298명을 보유했다.[13] 배재학당을 포함하여 감리교 모델에 따라 대학교 6개가 설립되었다. 감리교는 자체 신학대학인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서울에 설립했고, 이 외에도 신학원 6개와 중고등학교 54개를 운영했다.

리세형 목사, 하비에르 비에라 학장, 존 숄 감독, 송기성 목사, 김창곤 장로 및 기타 관계자들이 드루 신학대학에서 아펜젤러 흉상 제막식을 축하하고 있다.


2016년 10월 21일, 대한민국 서울의 정동제일교회에서 아펜젤러의 청동 흉상을 기증하여 드루 신학대학 캠퍼스에 헌정되었다. 정동제일교회 영어 목회 담당인 리세형 목사는 "정동제일교회 교인들과 한국 감리교인들에게는 마치 아펜젤러가 한국에 와서 자신을 헌신했고, 130년이 지난 지금 그를 다시 불러들여 깊은 감사를 표하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했다.[14]

5. 2. 후대의 평가



기독교대한감리회는 19세기 창립 이래 한국의 주요 개신교 교단 중 하나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2001년 당시 감리교는 교회 5,262개, 교인 1,394,514명, 목사 7,298명을 보유했다. 배재학당을 포함하여 감리교 모델에 따라 설립된 대학교 6개가 있었다. 또한 감리교는 자체 신학대학인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서울에 설립했다. 이 외에도 신학원 6개와 중고등학교 54개를 운영했다.[13]

2016년 10월 21일, 대한민국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기증한 아펜젤러의 청동 흉상이 드루 신학대학 캠퍼스에 헌정되었다. 정동제일교회 영어 목회 담당인 리세형 목사는 "정동제일교회 교인들과 한국 감리교인들에게는 마치 아펜젤러가 한국에 와서 자신을 헌신했고, 130년이 지난 지금 그를 다시 불러들여 깊은 감사를 표하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했다.[14]

6. 같이 보기

참조

[1] 논문 Henry Gerhard Appenzeller : His Contribution to Korean Independence, Democracy, and Modernization http://kiss.kstudy.c[...]
[2] 문서 The Legacy of Henry G. Appenzeller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1994-10
[3] 웹사이트 The Early Years of the RASKB: 1900-1920 http://anthony.sogan[...]
[4] 웹사이트 A Century After: The Legacy of the Appenzellers, Pioneer Missionaries to Korea https://web.archive.[...] Journal of the Historical Society of the EPA Conference 2012-08-03
[5] 서적 A Modern Pioneer in Korea: The Life Story of Henry G. Appenzeller https://archive.org/[...] Fleming H. Revell 1912
[6] 논문 Henry G. Appenzeller: Pioneer Missionary and Reformer in Korea http://archives.gcah[...] 2015-07-22
[7] 논문 Building a City on a Hill in Korea: The Work of Henry G. Appenzell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12
[8] 웹사이트 Chungdong First Methodist Church (서울 정동교회) https://english.visi[...] 2023-12-17
[9] 웹사이트 '한국의 어머니 교회' 정동제일교회 역사기념관 개관 https://www.themissi[...] 2023-11-07
[10] 웹사이트 신문 (新聞) https://encykorea.ak[...] 2024-02-11
[11] 웹사이트 대한그리스도인회보 (大韓Kristos人會報) https://encykorea.ak[...] 2024-02-11
[12] 서적 A Modern Pioneer in Korea: The Life Story of Henry G Appenzeller https://ia800306.us.[...] Fleming H. Revell Company 2023-10-13
[13] 백과사전 Empress Myeongseong
[14] 웹사이트 Chungdong First Methodist Church, Drew and GNJ Remember Appenzeller https://www.gnjumc.o[...] The Relay 2017-08-11
[15] 서적 A Modern Pioneer in Korea: The Life Story of Henry G Appenzeller https://ia800306.us.[...] 2023-10-13
[16] 서적 李樹廷
[17] 웹사이트 Person of the week : Alice Rebecca Appenzeller http://www.wellesley[...]
[18] 문서 이화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
[19] 백과사전 앨리스 아펜젤러 [Alice R. Appenzeller] 두산백과
[20] 웹인용 [ 아펜젤러 연구] 아펜젤러의 가문(家門) http://www.kmcdaily.[...] 2023-04-20
[21] 서적 아펜셀라 부자의 설교 https://books.google[...] 신앙과 지성사 2020-10-12
[22] 웹인용 [ 김낙환 목사의 아펜젤러 연구] 청년의 때에 교단을 옮긴 아펜젤러 http://www.kmcdaily.[...] 2023-04-25
[23] 웹사이트 A Century After: The Legacy of the Appenzellers, Pioneer Missionaries to Korea https://web.archive.[...] Journal of the Historical Society of the EPA Conference 2012-08-03
[24] 웹인용 A Modern Pioneer in Korea: The Life Story of Henry G. Appenzeller https://archive.org/[...] Fleming H. Revell 1912
[25] 웹인용 [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5) 한국 감리교의 아버지 아펜젤러(1858-1902) http://www.1907reviv[...] 2020-03-04
[26] 웹인용 [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5) 한국 감리교의 아버지 아펜젤러(1858-1902) http://www.1907reviv[...] 2020-03-04
[27] 서적 A Modern Pioneer in Korea
[28] 웹인용 (下) 아펜젤러 https://www.yna.co.k[...] 2015-09-14
[29] 웹인용 언더우드, "조선은 어찌할 터이냐?" 영적 메시지 들은 듯 '생생' https://www.jayupres[...] 2022-01-24
[30] 간행물 캘리포니아 기독교 옹호지(Christian Advocate)
[31] 웹인용 [배경] 아펜젤러의 한국선교 준비 http://www.1907reviv[...] 2006-07-05
[32] 서적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신대 출판부
[33] 웹인용 [아펜젤러 행전] 전운이 감도는 조선에서 시작된 선교 https://missionews.c[...] 2021-12-16
[34] 문서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
[35] 서적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신대 출판부
[36] 서적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신대 출판부 1998
[37] 백과사전 정동제일교회 [貞洞第一敎會] 한국학중앙연구원
[38] 백과사전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 [Henry Gerhard Appenzeller] https://terms.naver.[...] 두산백과
[39] 서적 A Modern Pioneer in Korea: The Life Story of Henry G Appenzeller https://ia800306.us.[...] Fleming H. Revell Company 2023-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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